暴君은 충직한 내시 김처선을 배를 갈라 죽였다 신문에서 퍼온 역사

1310년대 고려 26대 충선왕 무렵 탄광에서 일하던 사내 고용보는 원나라에 파견됐다. 거세(去勢)를 당하고 환관으로 끌려갔다. 대접 못 받고 굶주리는 광부로 사느니 남자 구실 못 해도 떵떵거리며 살 궁리를 했을 것이다.

어찌 보면 잘한 선택이었다. 투만티르(禿滿迭兒)로 개명한 고용보는 1333년 원 혜종에게 궁녀를 추천하면서 인생이 달라졌다. 차 수발을 들던 그녀는 성이 기()씨요, 고려에서 보낸 여자다. 훗날 황후가 되니 바로 기황후다. 기황후가 권세를 잡으니 고용보 또한 막강한 권력가가 되었다.

권력은 이 정도였다. 1343년 겨울 혜종이 고용보를 보내 충혜왕에게 옷과 술을 내렸다. 왕이 마중을 거부했다. 고용보가 '황제께서 언젠가 왕을 불경하다고 하였다'라고 하자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마중 나왔다. 황제 일행이 왕을 걷어차고 포박하니 왕이 고용보를 불렀다. 고용보가 왕을 꾸짖고 말에 실어 원으로 데려갔다. 이에 원 혜종이 '네가 백성을 박해함이 너무 심하여 너의 피로써 천하의 개를 먹인다 하여도 죄를 덮을 수 없다. 그러나 짐은 살생을 즐기지 않으므로 너를 유배하는 것이니 원망하지 말라.'(신원사·新元史 외국열전 고려 1343) 왕과 정승들은 고용보를 멀리서 보기만 해도 절을 했고, 뇌물을 받아 금과 비단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고려사 환자전·宦者傳)

일개 환관이 한 나라 왕을 꾸짖고 유배까지 보냈다. 나라가 굴러갈 리 만무했다. 훗날 '고려사(高麗史)'는 환자전이라는 고려시대 환관들 열전을 따로 뽑아 이들 작태를 기록했다. 환관의 발호와 당대 지배 이념인 불교의 폐해로 고려는 멸망했다. 조선은, 당연히 불교를 억압했고 환관 권한을 대폭 축소했다.

내시와 환관은 다르다. 거세한 남자를 '환관(宦官)'이라 하고 왕실 최측근 관료를 '내시(內侍)'라 했다. 고려 중기까지 내시(內侍)는 왕의 비서관을 뜻했다. 내시부는 젊은 엘리트 관료 집단이었다.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 또한 내시였다. 환관은 태생이 사내들이니 힘은 힘대로 쓰고, 고환을 도려냈으니 궐내 여자들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였다. 그래서 왕실 허드렛일은 이 환관이 맡았다. 그런데 환관 가운데 의종(1146~1170) 눈에 든 정함이라는 자가 내시부에 발령 나면서 환관이 내시 임무를 맡게 되었다(의종은 무신들 수염을 촛불로 태우며 업신여기다 쿠데타로 죽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시 정함은 용하게 살아남았다). 조선 왕조는 내시로부터 이런 막강한 정책 기획 권한을 빼앗았다. 감선(監膳·음식전명(傳命·왕명 출납수문(守門·문지기소제(掃除·청소) 같은 허드렛일이 임무였다. 그 내시직 충원 인력은 모두 거세당한 남자, 환관이었다. 내시는 사람이 아니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환관은 사람과 가까이할 수 없다고 하였나이다(古人云閽不得齊人).'(1453년 단종실록 11118)

국가 시스템이 비정상이면 난세(亂世)가 닥친다. 봉건시대 국가 시스템은 곧 지도자, 왕이다. 왕이 비정상일 때 난세다. 10대 왕 연산군(재위 14941506) 때가 그러하였다. 여색과 재화를 밝히고 사람 목숨을 곤충처럼 여긴 왕이었다. 1504년 연산군 10716일 하루 일과를 본다.

'조지서(造紙署·종이 만드는 관청)를 바삐 철거하라. 군사 100명을 데리고 창의문 밖에 거주하는 사람과 중을 쫓아내라. 처녀와 양인의 딸들을 모조리 궁궐로 부르라. 궁성에서 100척 떨어진 곳에 출입금지 표를 세우라. 친히 가서 점검하리라. 도성에 하루쯤 통행금지를 해도 상관없다. 모두 금하라. 경복궁 성 모퉁이로 남산 기슭, 낙산 산등성이까지 인가를 모두 헐고 건너편 산 밖을 (내 재산) 경계로 삼을 것이다. 철거한 뒤 내가 다시 보리라.'(1504년 연산군일기 10716)

별장 건축을 위해 세검정 조지서를 철거하라는 명부터 민가 강제 철거까지 국가와 관련된 명은 단 하나도 없었다. 매사가 이 모양이었다. 그리고 닷새 뒤 우찬성(부총리급)과 판서(장관급) 무리를 파견해 처리 과정을 점검했다.

이들과 동행한 사람이 내시 김자원(金子猿)이었다. 김자원은 내시 가운데 왕명 출납을 맡은 승전색(承傳色)이었다. 개인 비서실장이다. 폭군의 최측근이다. 제사 날짜를 관료들에게 물어오라 하니 심부름 대신 자기가 직접 날짜를 점지해 대답한(回啓) 사람이 김자원이었다.(8229) 민가에 벼락이 치면 점검한 사람도 김자원이었다.(10722) 김자원이 귀였고 눈이었고 입이었다. 승정원이라는 공식 비서실이 있었지만 연산군은 곧은 소리 해대는 관리들을 언제나 우회했다. '승전 내관 김자원이 명령을 전할 적에 가고 온 말이 많았으나, 승지와 사관(史官)이 참석하여 듣지 못하였다.'(연산군일기 1319)

연산군은 김자원을 가선대부(2·차관보급)로 승진시키기도 하고 수시로 곤장을 때리며 건방짐을 경계하기도 했다. 하지만 '연산군이 사치와 방탕만을 일삼는 동안 국가 정사는 오로지 내시 김자원에게 맡겨져 있었다.'(국사편찬위, 한국사, '중종반정과 기묘사화')

연산군은 그가 농락한 세상에 의해 폐위돼 강화도에서 죽었다. 중종반정이다. 김자원의 최후는 아무도 모른다. 처형됐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목숨 부지하고 영화를 누리려고 하는 짓거리가 간신 짓이다. 간신배는 목숨을 걸지 않는다.

충신은 목숨을 건다. 김자원이 승전색으로 위세를 떨치고 있을 때, 같은 내시부에 늙은 김처선(金處善·?~1505)이 있었다. 김처선은 연산군이 죽였다.

김처선은 세종 때 환관으로 궁에 들어간 이래 유배와 복직을 거듭했다. 1453년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켰을 때 포항에 유배 중이던 김처선은 김종서 반대파 집단 복직 때 함께 복직했다. 이후 행태가 기이했다. 2년 뒤 김처선은 금성대군과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에 연루돼 파직돼 노비로 전락했다. 그리고 2년 뒤 세조는 그를 복직시킨다. 공신으로 책록까지 해준다. 그런데 세조가 거둥하는데 시중을 들지 않고(1464년 세조10627), 시녀와 함께 만취해 길에서 뻗어버리는(1465년 세조 1193) 기행을 보였다. 그런 김처선이 성종 9년 정 2품 자헌대부로 승진했다. 장관이다.(1478년 성종 91212) 경국대전에 규정된 내시직 최고위 종2품보다 한 품계 위다. 사관(史官)'관직이 지나쳤다(官爵則濫矣)'고 할 정도로 파격적이었다.

업무 능력과 인격이 평가받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세조 앞에서 보인 추태도 왕을 모시는 데 빈틈없으라 교육받은 내시로서 할 바가 아니니, 불법으로 왕위를 찬탈한 세조가 마음에 들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의 죽음이 이런 추정에 설득력을 준다.

'입은 화의 문이요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 입을 닫고 혀를 깊이 간직하면 몸이 편안하여 어디서나 굳건하리라(口是禍之門舌是斬身刀閉口深藏舌安身處處牢).' 1504313, 재위 10년차 연산군은 모든 내시에게 이 글귀를 새긴 나무패를 차게 하였다. 천하의 세조를 무시했던 김처선, 이미 수차례 연산군에게 직언했다가 곤장을 맞은 사내였다. 이듬해 41일 실록은 이렇다. '환관 김처선을 금중(禁中·궁궐)에서 죽였다.' '연려실기술'은 그날 일을 이렇게 기록했다.

연산주가 어둡고 음란하였으므로 김처선이 매양 간하니, 연산주는 노여움을 쌓아두었다. 임금이 처용(處容) 놀이를 하며 음란함이 도를 지나쳤다. 김처선은 집안사람에게, "오늘 반드시 죽을 것이다"하고 입궐했다. "임금 네 분을 섬겼지만 전하처럼 행동하는 이는 없었습니다." 연산주가 활을 당겨 갈빗대를 맞혔다. 김처선이 말했다. "대신들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늙은 내시가 어찌 죽음을 아끼겠습니까. 다만 전하께서 오래도록 보위에 계시지 못할 것이 한스러울 뿐." 연산주는 화살 하나를 더 쏘아 공을 넘어뜨리고 그 다리를 끊고서 일어나 다니라고 하였다. 이에 처선이 "상감은 다리가 부러져도 다닐 수 있습니까"하자, 혀를 자르고 배를 갈라 창자를 끄집어내었다. 죽을 때까지 말을 그치지 아니하였다.

연산군은 양자 이공선을 죽이고 김처선 가문 재산을 몰수하고 집을 허물어 연못으로 만들고 친족을 멸하고 부모 묘까지 파괴했다. 김처선의 본관 전의(全義)를 없애버리고 이름에 있는 '()'자를 말하지 못하게 하였다. 절기 처서(處暑)를 조서(徂暑), 처용무를 풍두무(豊頭舞)로 바꾸었으며 국가 문서에도 처()자 사용을 금했다. 같은 이름을 가진 자들은 강제로 개명시켰다. 김처선을 배를 갈라 죽인 150541일부터 1506313일까지 폭군이 벌인 일이다. 왕위를 이어받은 중종은 김처선을 삼강행실 교과서에 싣자는 요청에 "술 취해 한 짓거리"라며 결재를 거부했다(1612년 중종 7124). 재평가는 246년이 걸렸다. '김처선은 그 충렬(忠烈)이 늠연(凜然)하였다.'(1751년 영조 2723) .

-조선일보, 2018.04.04.,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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