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사

옥살이 남편 死刑 소문에 아내 자결풀려난 남편 평생 눈물만

54일 부인의 생일, 해마다 이날이면 창이 환해지기도 전에 아들과 며느리, 조카고 딸이며 모두 집으로 와 새벽에 생일 축하 인사를 했다. 이광사(李匡師·1705~1777) 역시 일찍 일어나 부인에게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 음식들을 차려 가족과 함께 좋은 날을 즐기자고 이야기를 건넸다. 부인 문화유씨(文化柳氏)가 웃으며, “내가 뭐 귀한 몸이라고 생일 때마다 번거롭게 그래요?”라고 하면, 이광사는 아들 둘 장가 들였겠다, 집안의 마님이 되었는데, 부인이 귀하지 않다면 무엇이 귀하겠소라는 소소한 농담을 나누며 서로 웃었다.

부인의 친정에서는 쪽빛 보 아래에 뜨거운 김이 솟아오르는 떡을 보내왔고 국수장국에 꿩, 고기, 생선까지 많은 음식이 차려졌다. 이광사가 장난삼아 오늘 태어난 이가 어찌 이다지도 갑자기 웃고 말하며, 이리 금방 키가 컸으며, 젖을 먹지 않고 밥을 먹으며, 게다가 마음까지 어이 이리도 성숙한가!”라며 부인에게 애정 어린 농담을 건네면, 함께 모인 가족들은 모두 웃으며 행복한 식사를 나누었다.

이광사의 생일은 온갖 곡식과 과일이 풍성한 8월 그믐이라 아내가 아침저녁으로 별미를 장만해 상을 차렸다. 그러나 그는 일찍 여읜 부모를 생각하며 음식을 입술에 대지도 않았다. 부인은 음식을 들라 권하였지만 이광사는 끝내 들지 않아 부인은 섭섭해 울상이 되었다. 부인의 올해 생일을 맞아 지은 글에서 이광사는 그때 그 음식을 맛있게 먹어 부인이 기뻐하는 얼굴을 보지 못했던 것을 자책했다. 이광사는 더 이상 부인이 해준 음식을 먹을 수 없고, 부인이 지어준 옷을 입을 수 없었다.

이광사는 1755(영조 31) 을해옥사(乙亥獄事)에 연루돼 옥에 갇히게 되었다. 당시 3년이나 폐병에 걸려 고생하고 있었던 유씨부인은 남편이 살아나오지 못할 것이라고 여겨 식음을 전폐하였다. “이 양반이 이러한 지경에 들었으니 어찌 살아날 리가 있겠는가? 이미 살아날 수 없다면 내 어찌 구차히 살기를 기다리겠는가? 그러나 내가 우리 아버지께서 아끼고 길러주신 것을 생각하니 차마 칼로 남겨주신 이 몸을 해칠 수 없다. 남자는 이레 동안 먹지 않으면 죽고 여자는 여드레 동안 굶으면 죽는다고 하니, 여드레가 내가 이 세상에 머물 기한이다.”

유씨부인은 엿새 동안 한 모금의 물도 마시지 않았는데 갑자기 남편에게 사형을 집행할 것이라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이에 남편을 먼저 보낼 수 없다고 하여 자결하였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소문이었다. 유종원(柳宗垣)의 딸인 유씨부인은 이광사의 둘째 부인으로, 집안 살림에 관심 없는 이광사를 잘 보필하며 현명하게 집안을 유지하였다. 자신으로 인해 아내가 죽었으나, 자신의 손으로 장례조차 치르지 못한 이광사의 절절한 심정은 감히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이광사는 후에 함경도 부령(富寧)에 유배되었다. 1762(영조 38) 부령에서 아이들을 모아 가르친 것이 문제가 돼 전라남도 신지도(薪智島)로 옮겨져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그는 부인을 향한 그리움을 여러 시와 제문(祭文)에 고스란히 그려내었다. 유배지에 아들이 문안왔을 때 친척들의 편지가 책상에 한가득인데 부인의 글씨는 단 한 글자도 찾아볼 수 없고, 자신이 쓴 답장도 여러 통이지만 부인에게 부칠 반 마디도 없음을 슬퍼하였다.

-문화일보, 2018.04.16. 하은미 연구원

南海 펼쳐진 씨줄·날줄 고된 歷史와 삶을 엮다

먼저 섬에 깃들어 있는 이야기부터 앞세우자. 전남 완도에서 840m의 짧은 다리를 건너면 신지도다. 신지도는 유배의 섬이었다. 조선왕조실록 등을 뒤져 확인한 유배자만 40명이 넘는다. 그런데 이상한 건 신지도에 서원이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유배지들은 거기로 유배 온 내로라하는 선비들의 학문적 세례를 받게 마련이고, 유배자들에게 배운 후학들의 자취가 서원으로 세워지는 게 보통이지만 신지도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신지도로 유배 온 이들이 대부분 중죄인이었기 때문이다. 신지도는 멀다. 땅끝 해남을 지나 완도를 징검다리처럼 딛고 다시 건너가야 한다. 유배지가 멀다는 건 그만큼 처벌이 중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러니 큰 죄를 지은 죄인들만 신지도로 보내졌다. 신지도로 유배 온 중죄인들은 조정의 감시와 주민들의 경계를 담처럼 두르고 있었을 것이다. 주민들과 교유가 거의 없었으니 섬에 서원이 없고, 길러낸 후학도 없는 건 이 때문이리라.

신지도로 유배 온 이들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 바로 이광사다. 동국진체 서예의 대가. 이광사는 중국의 것이 아닌 우리의 필법을 개척했다. 글씨를 쓰는 일이 곧 정신을 드러내는 것이었던 시대. 이광사의 글씨는 서남해안 일대 선비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대표작이라 할 만한 글씨가 전남 해남의 대흥사에 있다. 제주로 유배를 가던 추사 김정희가 대흥사에 들러 내리고 내 것을 걸라고 했다가, 훗날 유배에서 돌아오는 길에 다시 대흥사에 들러 도로 걸어달라고 했다던 유명한 이야기에 등장하는 대웅보전 현판 글씨 말이다. 그의 글씨는 구례 천은사, 고흥 금탑사, 강진 백련사, 장성 백양사, 나주 심향사, 고창 선운사에도 있다. 남도 땅에서 만나는 이광사의 글씨에서는 특유의 기운이 느껴진다. 한눈에도 손끝으로 쓴 게 아니라 마음을 담은글씨라는 게 느껴지는 것들이다.

이광사가 유배형을 받았던 건 나주벽서사건에 연루됐기 때문이다. 나주벽서사건은 영조 즉위 후 세력을 잃은 소론의 일부가 나주 객사에 국정을 비방하는 문서를 붙였다가 적발된 사건. 이를 주동한 윤지의 문서 더미에서 이광사가 보낸 편지가 발견됐다는 이유로 그는 사건에 연루됐다. 처음에는 함경도 회령에서 유배생활을 했는데 그의 명망이 알려지면서 후학들이 몰려들자 죄인의 몸으로 문필을 가르치며 백성들을 선동한다는 상소가 올라와 이곳 외딴 섬인 신지도로 유배지를 옮겼다.

이광사는 모든 것을 잃고 이곳 신지도로 왔다. 부인은 자결했고, 명성은 한낱 물거품이었다. 처절한 절망 속에 살았을 그가 신지도에서 남긴 시 한 편에서 그의 비탄을 본다.

 

평생 속된 뜻 없이 살았거늘 늙어서 유배객이 되었네 꿈속에 친구의 서실을 찾기도 하고 길을 잃고 북극성을 바라보기도 했네 만 가지가 스스로 뜻을 얻은 듯하고 외로운 객이 더불어 마음을 기쁘게 하네점점 문장이 지극한 것을 사랑하는데 운명이 사나워지는 것만 근심할 뿐

 

스스로 쓴 시처럼 점점 문장은 지극해지는데 운명이 사나워지는 것을 근심하는 삶을 살았던 그는 신지도에서 세상을 떠났다. 유배형에 처해진 지 23, 신지도로 유배된 지 16년 만에 죽음으로 비로소 유배에서 풀려난 것이다. 말 그대로 사나운 운명이었다. 그가 말년을 살았던 집이 신지도 금곡리에 있다. 금곡리 마을회관 뒤편의 허름한 농가다. 지붕은 개량된 것이지만, 집의 골격은 예전의 모습 그대로란다. 마당 한쪽의 별채는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라 얼기설기 각목으로 흙벽을 겨우 버텨 놓았다. 아쉽게도 이광사가 신지도에 남긴 건 이 집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이제 그 집마저 목숨을 다해 가고 있다..

-문화일보, 2017.12.06., 박경일 기자.

 

日교수들 "'마루타' 731부대 장교 박사 학위 취소해달라"

일제 강점기에 만주에서 생체·세균실험을 저지른 일본 관동군 731부대의 관계자들에게 교토(京都)대가 의학 박사학위를 수여했다는 것에 반발해 일본 교수들이 학위 취소를 요청했다고 교토신문이 3일 보도했다. 교토신문에 따르면 2일 이케우치사토루(池内了) 나고야(名古屋)대 명예교수 등은 '만주 제 731부대 군 장교의 학위수여 검증을 교토대에 요구하는 모임... » 내용보기

대동법 시행 기념비

요즘 언론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 중 하나가 ‘증세’이다.새 정부가 연일 여러 국정과제를 제기하고 있는데, 그것들에 대개 큰돈이 들기 때문이다. 문제는 필요한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에 대해서 정부가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국정과제 해결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대개 공감하지만, 증세는 환영받기 어렵기 때... » 내용보기

메이지 일본의 ‘성공’ 비결

일본 홋카이도 남단 하코다테에 가면 고료카쿠(五稜郭)라는 성이 남아 있다. 1868년 궁정 쿠데타로 천황을 빼앗기고 한순간에 ‘조적(朝敵·조정의 역적)’이 된 도쿠가와 막부군이 마지막 저항을 했던 곳이다. 교토를 탈출한 막부의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본거지인 에도(江戶·지금의 도쿄)로 돌아왔다. 사이고 다카모리가 지휘하는 천황군은 에도 코앞까지 진군해... » 내용보기

暴君은 충직한 내시 김처선을 배를 갈라 죽였다

 » 내용보기